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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J컬처'를 이끈 아리타야키 본문
19세기 'J컬처'를 이끈 아리타야키
메이지유신으로 출범한 근대국가 일본이 해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는 막대한 대외수지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십 수년 동안 계속된 수입초과로 국부 유출이 심각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서구문명국의 대표적인 국제이벤트였던 만국박람회(EXPO)에 참가하여 일본을 홍보하고 나아가 일본공산품 수출의 물꼬를 터는 것이었다.
마침내 1873년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에 각지에서 엄선한 공예품을 전시하여 일본을 알리는 것에 메이지정부는 심혈을 기울였다. 그 중에서도 이전부터 유럽 상인들이 가장 선호했던 아리타야키에 큰 기대를 했다. 결과는 박람회 위원회에서 아리타야기가 명예 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대성공이었다. 아리타야키 도자기 외에 일본의 회화, 공예품으로 일본문화를 서구인들에게 각인시켜 이후 약 30년간 일본문화를 유행시킨 '쟈포시니즘'의 시작이었다.
‘쟈포니즘’이란, 19세기 중엽 유럽에서 일어난 일본문화에 대한 취미 또는 심취를 이르는 말로 프랑스어로 ‘쟈포니슴(japonisme)’이라 한다. 쟈포니즘은 일과성이 아닌, 당시 구미 선진국에서 30년 이상 지속된 J컬처 붐의 사회현상으로 르네상스에 필적하는 서양의 근대적 미의식과 과학적 시각이 형성된 변혁운동의 한 단계였다. 특히 빈에 열 만국박람회에 출품된 일본의 미술작품은 유럽의 인상파 화가들과 아르누보(art nouveau) 작가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도자기 산업의 발달사: ‘예술의 후원’과 치열한 경쟁
1854년 ‘개항開港’이라는 일대 격변의 시대를 맞아 아리타야키는 다시 한 번 도전에 직면한다. 막부 정부는 서구 여러 나라와 체결한 수교 조약에 따라 막부가 관리하는 유일한 대외 창구였던 데지마 외에 요코하마, 코베 등지에 서양인의 상관商館이 설치되고 교역 채널이 다양화되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상인들이 독자적으로 아리타야키 수입에 나서면서 유럽 시장에 적합한 서양식 식기 제작을 생산자들에게 주문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식 도자기가 아니라 서양 식문화에 맞춘 찻잔, 접시, 주전자, 화병 등이 주요 품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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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폐번치현’은 아리타 일대의 요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번이 폐지됨에 따라 기존에 번의 비호를 받으며 주문 생산에 전념하던 요들이 이제는 완전히 홀로서기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위기와 혼란의 상황 속에서 이라타 요들은 품질 향상에서 답을 찾는다. 유럽 시장에서 선호되는 더 희고 얇은 본체에 정교함이 극에 달한 세공 문양을 넣어 좀 더 경쟁력 있는 품질과 다자인의 완성도를 높이면서 생산 방식의 합리화와 기술 축적에 진력하였다.
(pp. 203-204)
만국박람회로 판로를 뚫다
막번체제 붕괴 이후 국정의 주체가 된 중앙정부의 가장 큰 고민은 막대한 대외수지 적자였다. 개항 이후 영국의 값싼 면제품은 국내 면직물 산업에 괴멸적 타격을 가했고, 십 수년에 걸친 수출입의 불균형으로 국제수지는 크게 악화되어 국부 유출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수출 증진이 시급했던 일본 정부는 당시 문명개화국 클럽의 상징이었던 만국박람회(EXPO)를 수출 진흥의 돌파구로 설정하고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 참가를 준비한다.
일본 정부는 1873년 오스트리아 빈 만국박람회를 공식 데뷔 무대로 삼는다. 일본 정부는 1300평의 부지에 일본식 신사와 정원을 조성하고 일본 각지에서 엄선된 공예품과 물산을 전시하였다. 그 중에는 아리타야키가 대표 상품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빈 박람회 준비 책임자였던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공무대신(현재의 통산대신)을 비롯하여 빈 현지 책임자인 사노 츠네타미佐野常民 전권공사는 모두 사가현 출신이었다. 이들은 아리타야키의 가능성에 대해 누구보다 확신을 갖고 출품을 적극 지원하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박람회 위원회에서 선정한 명예 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아리타야키는 큰 인기를 모았다. 여기에서 한 가지 비결이 있었다. 박람회 출품을 의뢰받은 아리타의 제작자들은 서양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관람객들의 시선을 한눈에 끌 수 있도록 초대형 도자기를 만드는 전략을 택한다.
(pp. 204-205)
‘교육과 문화’를 주제로 개최된 빈 박람회에는 수백만 명의 유럽인 관람객이 다녀갔고, 아리타야키를 비롯한 일본의 회화ㆍ공예품은 관람객들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당시 빈 만국박람회를 통해 높아진 일본 문화에 대한 서구인들의 관심은 유럽 예술계에 ‘자포니슴 Japonosm’) 유행의 기폭제가 되었다.
(p.207)
박람회 폐막 후 영국의 한 사업가가 일본 파빌리온의 일본식 정원을 통째로 뜯어서 구매하고 싶다고 제안하면서 주최 측에 보증서 certificate를 요구한다. 일본 정부는 현지에서 ‘기립공상회사 起立工商會社’라는 반관반민 성격의 무역회사를 급조하여 보증서를 발급하였다. 급조된 조직으로 출발했지만 회사 형태 조직의 유용성을 체험한 관계자들은 이듬해 토쿄에 사무소를 개설하고 공예품과 미술품을 위주로 일본 물산을 해외에 수출하는 업무를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일본식 무역진흥공사(JETRO)의 원형이었다.
(p. 208)
민관학 공동 체제로 해외체제로 개척하다
아리타에서도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자구 노력이 진행된다. 가장 영향력 있는 요의 책임자와 사업가들이 모여 1875년 ‘코란샤(香蘭社)’라는 합본合本 단체를 설립한다. 일본 최초의 회사형 결사結社라고 일컬어지는 영리조직이다. 1876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는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박람회 개최가 예정되어 있었다. 코란샤는 떠오르는 경제대국인 미국 시장을 겨냥하여 필라델피아 박라회 참가에 강한 의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국내외적인 사정으로 필라델피아 박람회에는 참가하지 않는 방침이었다. 빈 박람회의 경우처럼 정부의 비용으로 참가는 방안은 좌절되었지만, 코란샤는 일본 정부의 주선으로 자비 참가의 기회를 얻게 된다.
(pp. 208)
코란샤의 아리타야키들은 필라델피아에서도 큰 호평을 받으며 금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둔다. … 필라델피아 박람회에 출품된 아리타야키는 이러한 민관학 공동 노력의 산물이었다.
때마침 비슷한 시기에 설립된 보스턴미술관은 의욕적으로 동양 미술품 컬렉션을 확충하고 있었다. 보스턴미술관이 만국박람회에 출품된 코란샤의 작품들을 높이 평가하고 구입에 나서면서 미국 예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아리타야키의 인지도와 존재감이 크게 높아진다. 기립공상회사는 아리타야키에 대한 미국 소비자의 뜨거운 반응에 고무되어 박람회 이듬해인 1877년 뉴욕 브로드웨이에 ‘The First Japanese Manufacturing and Trading Company’라는 이름으로 지점을 설립한다. 최초로 서구 도시에 설립된 일본 상품 판매점이었다. 우키요에 회화나 칠기 등 여타 공예품도 판매하였지만, 주력이 된 것은 아리타야키를 비롯한 도자기였다.
(p. 209)
이삼평이 일본 땅에서 최초로 자기를 만든 이후 250여 년 동안 원천 기술을 제공한 조선의 도자기가 고립 또는 정체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이리타야키는 일본의 도자기를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산업으로 견인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예술적ㆍ경제적 가능성의 지평을 넓혀갔다. 양자 간의 차이를 만든 것은 무엇일까?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밀라노의 비스콘티와 스포르차, 페라리의 에스테, 만토바의 곤차가 등 귀족 가문은 예술가를 후원하였고, 이는 서구 근대 문명의 원점인 르네상스를 추동하였다. 예술가 후원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메디치가의 로렌초 ‘위대한 로렌초 Laurenzo il Magnifico’로 불리게 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대의 예술 후원은 단순히 지배자 개인의 취미가 아니라 통치의 정당성과 권위를 확보하는 정치작용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상업과 금융으로 부를 쌓은 메디치가는 교권敎權이나 왕권 등 기존 통치 관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통치 정당성을 예술의 후원이라는 선정善政 euergetism에서 찾은 것이다.
이러한 르네상스기의 전통은 이후 유럽의 통치 질서에 보다 보편적 형태로 자리를 잡게 된다. 16세기 이후 유럽의 근대국가 성립 과정에서 왕실과 귀족 등 지배층의 ‘예술의 후원자’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이 통치력 강화에 필수적이었고, 이는 음악ㆍ미술ㆍ문학 등 다방면에서 유럽 문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고급 문화예술 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고급 문화예술은 다수에 의해 소비되어 상업적 활력을 갖추기 전까지 그를 애호하고 후원함으로써 취약한 생존력을 보완하고 기술적 축적을 지탱해줄 수 있는 소수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18세기 중반 모차르트는 왕가와 귀족의 종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빈 중산층의 소비 가능성을 믿고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고급 음악에 대한 대중소비 시장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하여 모차르트는 경제적 곤궁에 처하고 그의 예술적 재능마저 소모된다. 문화예술 영역에서도는 천재도 시장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베블런 T.Veblen은 그의 저서 『유한계급론』에서 상류층이 신분과 부를 드러내기 위해 ‘과시적 소비’를 하면, 고급 문화예술의 소비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고 비꼬았다. 그러나 예술가 입장에서는 이러한 과시적 소비를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볼 수가 없다. 그러한 소수의 소비가 있음으로써 대중의 기호나 수요를 의식하지 않은 예술성 추구와 기술적 축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pp. 210-211)
일본의 도자기 발달사는 이러한 ‘후원 patronage’과 ‘과시적 소비’가 문화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일본의 도자기문화는 차문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차문화는 지배층 사이의 표피적 유행 수준을 넘어 예술의 경지로 격상되었고, 지배층이 차문화의 후원자로서 과시적 소비를 경쟁적으로 벌인 것이 도자기 발달의 물꼬를 텄다. 지배층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을 보유한 도공들은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지위 향상의 인센티브를 부여받으면서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조선과 달리 중앙정부가 도자기 제작권을 독점한 것이 아니라 여러 번藩들 사이에 최고의 도자기 생산을 위한 치열한 경쟁이 펼쳐진 것도 도공들의 처우 개선과 신기술 개발에 도움이 되었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기술은 다이묘와 도공들 사이의 ‘후원자-피후원자 patron-client’적 관계 덕분에 원천 기술을 뛰어넘는 축적을 이룰 수 있었다. 일본 지배층의 다구에 대한 탐닉과 후원이야말로 일본 도자기문화 발전을 위한 마중물이었다.
도자기는 공예품이자 생활용품이다. 실용적 효용을 얻을 수 있는 물건이기에 그림이나 음악에 비해 소비의 확장성이 훨씬 크다. 도시화와 상업화의 진전으로 차문화가 점차 일반 계층으로 침투하면서 공급과 수요의 여건이 성숙되자 도자기 시장이 형성된다. 공급자들은 다양한 브랜드의 상품을 출하하며 경쟁하였고, 경쟁의 승패는 시장에서 소비자들의 선택에 의해 좌우되었다.
시장이 형성됨으로써 비로소 도자기문화는 소수의 후원에 의존하는 초기 단계에서 벗어나 두터운 소비자층에 의해 유지되는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걸을 수 있었고, 19세기 초반에 이르면 수많은 주체가 참여 하여 거대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도자기의 산업생태계가 구축된다. 에도시대는 이처럼 민간 부문이 거대한 소비력을 바탕으로 사회적ㆍ문화적 활력이 생성되고 적응과 진화가 거듭된 시대이다. 일본이 근대화시기에 보여준 놀라운 외부 문물의 흡수와 발전 능력은 이미 에도시대부터 축적되고 있었다.
(pp. 211-213)
출처: 신상목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뿌리와이파리,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