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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학

임진왜란 이후, 도자기산업 대국이 된 일본

외톨늑대 ROBO 2022. 1. 17.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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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으로 도자기산업 대국이 된 일본

사가현-이마리・아리타-(伊万里・有田)-오카와치야마(大川内山)
사가현-이마리・아리타-오카와치야마

임진왜란 이후, 도자기산업 대국이 된 일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ㆍ케이쵸의 역 文祿ㆍ慶長の役’라 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망상이 가져온 이 전쟁을 일본에서는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쟁 통에 일본에 건너온 조선의 도공들에 의해 고급 도자기 기술이 전수되었기 때문이다. … 한국에서는 이것을 두고 (조선의 도공들을 끌고 갔다는 것에 대한 분노와 함께) 문화적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역시 일본은 조선의 문물을 받아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우월감을 느끼는 것은 좋으나, 먼저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의 도자기 기술이 어떠한 발전과정을 거쳤는지를 알면 좋을 것이다.

 

임진왜란ㆍ정유란 시기에도 도일渡日한 조선의 도공들은 주로 큐슈 북부 일대에 터를 잡는다. 가장 먼저 도자기를 빚기 시작한 곳은 ‘히젠노쿠니肥前国’이다. 지금의 사가현과 나가사키현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히젠에는 일본식 재래 요窯가 산재해 있었다. 이 일대에서 생산된 토기土器를 ‘카라츠도키唐津土器’라고 한다. 도기를 생산하기는 했지만 당시 일본의 기술은 조선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pp. 191-192)

다도의 유행과 도자기 전쟁

일본의 도자기문화는 차茶문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일본은 당시 차문화가 지배층에서 대유행하며 다도茶道로 격식을 갖춰가고 있었다. 9세기 당나라에서 유입된 차를 마시는 습관은 불가佛家의 문화였으나 무로마치 시대를 거치면서 무가에 퍼져 점차 예禮와 미의식을 담은 문화의 정수精髓로 자리 잡는다.

 

일본의 차문화 융성에 있어 결정적인 시기가 ‘아즈치ㆍ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1573~1603년. 노부나가의 본거지인 아즈치성安土城과 히데요시의 본거지인 모모야마성桃山城에서 비롯된 말)이다. 오다 노부나가와 토요토미 히데요시 두 최강 권력자는 다도에 흠뻑 빠졌고, 두 사람의 다도 스승이자 차성茶聖이라 불린 센노리큐千利休는 다도에 ‘와비侘’ 정신이라는 고결함의 미의식과 ‘이치고이치에一期一’의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다도를 일종의 행위예술로 완성하였다. 당시의 다도는 단순히 차를 마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다도는 가장 높은 수준의 문화적 행위이자,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표상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1610년대까지 생산된 카라츠야키는 인기를 누리기는 하였지만, 아직 도기의 수준을 벗어나기 못했다. 중국이나 조선에서 생산되는 자기磁器에 비하면 몇 수 아래였다. 큐슈 북부 일대에 조선 도공들이 터를 잡은 지 십 수년이 경과하면서 기존의 카라츠야키를 훌쩍 뛰어넘는 고품격 도자기들이 생산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도자기가 ‘아리타야기有田’이다. 아리타야키의 등장은 일본의 도자기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었다.

(pp. 193-194)

 

이삼평을-도조로-모시는-스에야마신사(陶山神社)

도자기의 신, 이삼평

‘아리타야키’라는 이름은 사가佐賀번의 아리타有田라는 지명에서 유래하였다. 사가번은 영주의 성을 따서 나베시마鍋島번이라고도 한다. 번조藩祖인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는 조선 침공 시 인신을 확보한 조선 도공들을 영지로 송환하는데, 그 중에 이삼평李參平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삼평은 아리타야키의 창시자로, 일본에서는 ‘도조陶祖’, ‘도자기의 신神’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 이삼평은 사가번 일대를 답사하다가 1616년 아리타 인근 이즈미야마 泉山에서 질 좋은 자석광磁石鑛을 발견한다.

 

자석은 카오링高嶺(중국의 경덕진景德鎭에서 자기가 생산된 것도 인근의 카오링高嶺이라는 곳에서 자석이 생산되었기 때문이다)이라고도 하며, 자기 생산에 필수적인 광석이다. 이삼평은 도토陶土, 풍부한 땔감, 깨끗한 물의 3박자를 갖춘 아리타의 시라카와白川에 조선식 가마를 짓고 도자기를 굽는다. 후에 텐구다니요天狗谷窯라고 불리게 되는 전설적인 가마이다.

 

17세기 초반 시점에서 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 조선, 베트남밖에 없었다. 유럽조차도 자기를 만들지 못하였다. 이제 일본이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당시 나오시게는 모시던 군주를 하극상으로 몰아내고 권력의 실세가 되었으나 아직 봉토를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나베시마가家는 구영주 세력의 반발을 무마하고 막부의 지지를 얻기 위해 중앙 정가에서의 정치력이 필요했다. 험난한 과제를 앞에 두고 있던 나베시마에게 일본 최초의 자기 생산은 일대 호재였다. 나베시마가는 이삼평의 자기 생산을 사활을 걸고 지원한다.

 

이삼평은 창의력이 뛰어나고 생산관리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었다. 유백색의 자기에 예술성을 더하기 위하여 청화백자 디자인을 도입한다. 자기의 표면에 중국에서 수입한 코발트 계열의 안료顔料로 푸른 물감을 만들어 당시 일본 지배층이 선호하던 중국풍 그림을 그려 넣고, 높은 온도로 그릇을 구워냈다. … 이삼평은 조선과 중국의 방식을 참고하여 분업 생산 방식을 고안한다. 태토胎土 채취부터 반죽, 성형成形, 시문施紋, 소성燒成에 이르기까지 일사분란한 분업체계가 구축되자 아리타야키의 생산성은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품질은 더욱 향상되었다.

 

아리타야키가 유명세를 타자 큐슈 일대의 일본인 도공들이 아리타 근처에 몰려들어 조잡한 품질의 도자기를 생산하는 요가 난립하였다. 요업窯業의 필수 자재인 땔감이 빠르게 소진되고, 남벌濫伐로 주변 산이 민둥산이 되어가자 나베시마번은 특단의 조치에 나선다. 1638년을 기해 아리타 일대의 일본인들을 내쫓고 기술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외부인들이 아리타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나베시마의 이삼평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삼평은 번으로부터 ‘카나가에산베에金江三兵衛’는 일본명의 사용을 허락받는다. 성姓을 허락받은 것은 일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655년 이삼평이 세상을 떠나자 텐구다니요 부근에 그의 묘비가 세워지고, 1658년 그를 신으로 모시는 스에야마陶山 신사가 건립되었다. 나베시마번 사람들은 최대한의 예우를 다하여 이삼평의 공적을 기렸다.

(pp. 194-197)

진화하는 아리타야키

1650년대가 되자 조선에서 건너온 도공 1세대들은 거의 세상을 떠나고 아리타야키도 변화의 시대를 맞이한다. 1610~1640년대 사이에 생산된 아리타야키를 ‘초기 이마리’라고 한다. 초기 이마리는 조선의 기술과 솜씨, 중국의 디자인, 그리고 일본 지배층의 후원이 상호 작용하여 탄생한 국제적 결합의 산물이다. 이마리야키가 조선의 직접적 영양하에 있던 것은 여기까지이다. 이후 아리타야키는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일단 자기가 생산되기 시작하자 일본 특유의 ‘이이토코토리いい事取り’ 정신이 발휘된다. 초기 이마리는 청화 방식, 즉 본체 성형 후 초벌구이 없이 바로 그림을 그려 넣고 유약을 발라 굽는 소메츠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자기 표면에 은은하게 번지는 청화 문양은 아름다웠지만, 문양의 선명도를 높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중국에서는 청화자기에서 벗어나 다양한 색을 사용하는 오채五彩 자기로 업그레이드되고 있었다. 색이 다양해지면서 그림을 그려 넣는 기술이 업그레이드된다. 초벌구이를 한 다음에 문양에 그려 넣고 유약을 발라 재벌구이를 하여 완성하는 채색회화 방식이다. 이라타 지역에서는 1640년대부터 이러한 중국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채용한 채색회화 자기(소메츠케染付와 구분하여 ‘이로에色 방식이라 한다)가 생산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생산된 다채로운 색과 정교한 문양의 자기를 일본에서는 ‘코쿠타니古九谷’ 양식이라 한다. 코쿠타니 양식의 유행은 아리타야키요窯 간에 본격적인 기술 경쟁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예고였다.

 

1650년대 들어 명ㆍ청 교체기라는 국제정세의 변화를 맞아 국제 도자기시장이 요동을 치면서 일본 도자기는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는다. 당시 청을 적대시하며 복명復明운동에 앞장서고 있던 정성공鄭成功은 동중국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하면서 힘을 키우고 있었다. 1655년 청나라는 정성공을 견제하기 위해 해상 교역을 차단하는 해금령海禁令을 발령한다. 청의 조치에 엉뚱하게 타격을 입은 것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였다. 중국 도자기를 유럽에 수출하는 것이 큰 수익원의 하나였던 동인도회사는 중국 도자기의 유통 중단으로 큰 타격이 예상되자, 대체품으로 이마리야키에 눈을 돌린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미 1650년에 이마리야키를 베트남 왕실에 납품하면서 이마리야키의 상품성에 주목하고 있었다. 1659년부터 대량의 이마리야키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과 중동 일대에 수출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약 50년 동안 이마리야키는 유럽의 도자기 시장을 석권하며 황금시대를 구가한다.

 

이때 유럽에 수출된 이마리야키는 초기 이마리와는 완전히 성격을 달리하는 ‘카키에몬枾右衛門’ 양식이 주를 이루었다. 사카이다 카키에몬酒井田枾右衛門을 원조로 하는 방식은 청靑ㆍ적赤ㆍ황黃ㆍ녹綠 등 다채로운 색을 사용하고, 중국풍에서 벗어난 일본 고유의 회화와 문양을 정교하게 그려 넣은 것이 특징이다. 세밀한 정교함과 정제된 화려함을 특징으로 하는 카키에몬 양식의 이마리야키는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의 취향과 딱 맞아떨어져 유럽시장에서 소위 ‘대박’을 터뜨린다.

(pp. 197-199)

 

17세기 후반이 되면서 이마리야키는 주시장인 유럽인의 기호에 맞추기 위해 화려함을 더해간다. 금색과 적색 안료를 풍부하게 사용하는 중국의 ‘금란수金襴手(きんらんで) 양식을 더한 17세기 말의 이마리야키는 호화로움의 극치였다. 이러한 당시 이마리야키 작품들은 독일의 샤를로텐부르크 Charlottenburg 궁전, 노이슈반슈테인 Neuschuwanstein 성, 영국의 버글리 하우스 Burghley House,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Versailles 궁전 등에 아직도 그 자취가 잘 남아 있다. 이마리야키는 중국의 경덕진 도자기에 필적하는 최고급 자기로 대접받았고, 유럽의 자기 발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유럽은 17세기까지 자기를 만들지 못하다가 1709년 독일의 작센 지방에서 처음으로 카오리나이트(고령석)를 사용한 경질硬質 자기 생산에 성공한 이후에야 비로소 자기 산업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작센 지방의 자기 공장이 세계 3대 도자기회사의 하나로 불리며 초고가 자기로 유명한 독일의 마이센 Meissen 도자기의 출발점인데, 초기 마이센 자기는 형태ㆍ문양 등에서 이마리야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p. 200)

 

하이엔드부터 보급형 자기까지

금란수 기법까지 도입하며 호화로움을 강조한 이마리야키는 요즘말로 하면 수출전용 상푸이었다. 일본 국내시장은 상황이 달랐다. 일본 내에서 최고의 명성을 얻은 이마리야키는 ‘나베시마야키’였다. 나베시마야키는 나베시마번이 직접 관장하는 번요藩窯에서 생산된 제품을 말한다. 나베시마번은 이삼평의 자기 생산 이래 쇼군가에 최고급 자기를 헌상하면서 번세藩勢를 키워왔다. ……

 

기술 유출 방지를 위한 엄격한 통제와 비싼 가격으로 인해 아리타 일대에서 생산되는 자기들은 유력 무사나 호상들의 기호품에 머무른 채 쉽게 대중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삼도三都를 비롯한 도시부의 민간 소비력 증대를 배경으로 다소 투박하고 정교함이 덜한 중저가형 자기가 민간에도 서서히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 19세기 중반 이후 일본에는 수출시장과 내수시장의 특성에 따라 제품이 차별화되고, 수요에 따라 하이엔드 제품과 보급형 제품이 다양하게 공급ㆍ유통되는 대중소비 시장이 형성된다.

(pp. 201-202)

 

출처: 신상목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뿌리와이파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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