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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에게 할복자살 당한 일본의 다성 센리큐와 나팔꽃 사건 본문
히데요시에게 할복자살 당한 일본의 다성 센리큐와 나팔꽃 사건
추사 김정희와 교류하고 다산 정약용에게 다도를 가르친 조선의 다성(茶聖) 초의선사(艸衣禪師 1786∼1866)가 있었다면, 일본에서는 초의보다 약 200년 전에 살았던 센 리큐(千利休 522-1591)라는 다성(茶聖)이 있었다. 그는 간소・간결・질박・고요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와비챠(侘び茶)를 완성하였고, 무심하게 만들어진 조선의 생활자기 이른바 '막사발'을 최고의 찻잔으로 쳤다.
안타깝게도 그의 죽음은 당시 일본 최고의 권력자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강요에 의해 할복자살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史實)이다. 리큐를 죽음으로 이르게 한 것은 '나팔꽃 사건'으로 추측한다.
리큐(利休)가 천하의 히데요시(豊臣秀吉)라 할지라도 머리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는 다이토쿠지(大德寺)의 낮은 산문(山門) 안에 나무로 깎아 만든 자신의 조각상을 설치한 것이 공연한 이유가 되겠지만, 이것 또한 표면상의 이유에 불과할 것이다.
당시 조선침략을 둘러싸고 사카이(堺))의 거상(巨商)으로 오사카(大阪) 지방의 이권을 대변하는 리큐(利休)와 큐슈(九州)의 하카타(博多)를 중요시하는 히데요시(秀吉)와의 사이에 정치적인 갈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하여 유명한 '나팔꽃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히데요시는 리큐의 집에 나팔꽃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자주 들었다. 어느 날 히데요시는 리큐에게 "자네 집의 나팔꽃을 보고 싶은데…"라고 하자, 리큐는 "내일 아침 일찍 저희 집에 오십시오. 나팔꽃을 보여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음날 아침, 히데요시가 리큐의 집에 갔는데, 소문의 나팔꽃이 한 송이도 보지 않았다. 황당해 하는 히데요시를 리큐는 그의 다실로 안내했다. 다실에 들어선 히데요시의 눈에 띈 것은 작은 꽃병에 꽂힌 나팔꽃 한 송이뿐이었다. 당일 아침, 리큐는 히데요시에게 보여 줄 한 송이만 따내고, 나머지는 모두 잘라 없애버렸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이른 아침 깨끗한 공기와 햇살과 고요 속에서 핀 한 송이 나팔꽃의 지순한 아름다움을 본 순간 "과연 리큐답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다도를 하는 일본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히데요시와 리큐의 유명한 나팔꽃 일화다. 리큐와 '와비차(侘び茶)의 정신'을 이야기하거나 히데요시와 리큐의 좋은 시절을 이야기할 때 자주 회자된다.
그런데 히데요시는 진정으로 리큐가 추구하는 미(美)를 이해했고, 또 진심으로 리큐를 칭찬했을까? 적어도 이 '나팔꽃 사건'에 대해서만큼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히데요시는 순간적으로 리큐의 도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교토의 키타노대다회(北野大茶會)에서 화려한 '황금다실'을 내놓고 만족하는 정도의 히데요시에 대해 "너 같은 천박한 주제에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랴?"라고 하는 리큐의 강력한 도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순간적으로 "과연 리큐답다"고 말했을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물질적 향락과 사치로 만족하는 정도의 히데요시는 리큐가 추구하는 고고한 아름다움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리큐가 추구하는 '절제와 고요의 미'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정도는 알 만큼 영리했다. 말하자면 '무지의 지'와 같은 것으로 이것은 두 사람 사이에 있어서 불행이었다.
히데요시는 어린아이가 만발한 나팔꽃을 보고 기뻐하는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당일 아침 일찍 리큐의 집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리큐가 히데요시에게 도전하는 형국이 되었고, 히데요시는 리큐에게 "네가 정녕 미를 추구한다면, 미를 위해 죽을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때 만약 리큐가 히데요시 앞에 무릎 꿇고 빌었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도 리큐를 죽였을까? 결국, 리큐는 할복하게 되었다.
와비챠(侘び茶)는 이렇게 리큐의 죽음으로 미로서 영원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 출전: http://www.geocities.jp/michio_nozawa/episode70.html
[주]
교토 소재 다이토쿠지(大德寺・孤蓬庵)에는 리큐(利休)에 의해 수집된 조선에서 건너간, 흔히 막사발('생활자기'로 부르는 것이 적절)로 불리는 정도다완(이도챠완 井戶茶碗)이 소장되어 있다. 지금은 일본 국보(26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도챠완으로 리큐의 '와비차(侘び茶)'가 완성될 수 있었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와비(侘び 또는 寂び)'를 동양의 마음이라고 하고, 이도챠완(井戶茶碗)에는 자유분방하면서도 깊고 엄격한 미가 숨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와비의 미(美)'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