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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파라노이아가 아니라,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는 스키조프레니아가 답이다

외톨늑대 2022. 2. 12.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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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노이아가 아니라, 스키조프레니아가 답이다

아이돌 가수 강디니엘이 지난해(2021)에 발표한 디지털 싱글 <파라노이아>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자신의 내적 갈등을 가사로 표현하였기에 공감이 컸던 것 같다.

 

파라노이아paranoia), 심각한 걱정이나 두려움으로 내적 갈등을 겪는 편집()적 상태를 말하는데이와 대비되는 상태를 '스키조프레니아schizophrenia'라 한다. 이 두 용어는 1984년 일본에서 유행어대상(세태를 반영한 말을 선정하여 시상)에서 동상을 수상할 정도로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이 두 용어는 원래 포스트구조주의 철학 용어인데, 유행하게 된 사정은 이렇다질 들뢰즈와 펠릭스 과타리의 공저 『안티 오이디푸스』(1977)에서 사용된 이 용어를 비평가인 아사다 아키라(浅田彰)가 『도주론』(1984)에 소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아사다는 이 책을 통해 신자유주의 등장과 함께 종래의 중후장대형 산업사회, 안정적 종신고용, 가족중심의 정주형사회에서 경박단소형 지식정보사회, 불안정 고용, 탈가족의 이동형사회로 변화함에 따라 가치관이 바뀌어야 할 것을 시사하였다. 말하자면, 하나에 집착하거나 한 곳에 정주하는 파라노이아형 인간에서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이동하거나 도망칠 수 있는 스키조프레니아형 인간이 사회로부터 선택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진화사회학적으로 말하면, 적자생존이 아니라 자연선택이 답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젊은 철학자 야마구치 슈는 2019년에 쓴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에서 <재빨리 도망칠 줄 아는 사람이 승리한다>는 제목으로 '파라노이아와 스키조프레니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각각 뜻을 살펴보면 파라노이아는 편집증을, 스키조프레니아는 분열증을 말한다. 파라노이아는 무엇에 편집하는 걸까? 바로 ‘아이덴티티identity’다. 파라노이아형 인간은 이를 테면 ‘○○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근무하며 ○○동네에 살고 있는’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집착하고 이 정체성을 더욱 세밀한 부분까지 파고들어 새로운 정합적 특질을 획득하는 데 매진한다. 인생에서는 종종 우발적인 기회나 변화가 나타나곤 하는데, 그때마다 기회와 변화를 받아들일지 말지는 축적해 온 과거의 아이덴티티와 꼭 들어맞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그렇기에 파라노이아형 인간은 타자가 보기에는 ‘일관성 있고 알기 쉬운 인격과 인생’이다.

 

들뢰즈는 다른 저서 『천 개의 고원』에서 서양 철학이 오랜 세월 동안 근본으로 삼아 온 출발점을 토대로 트리형에 가지와 잎을 정합적으로 펼쳐 나가는 식의 논리 구조를 한편에 두고, 그와 대비하여 출발점을 갖지 않고 무질서하게 확산해 가는 뿌리형 개념을 들고 나와 이것을 리좀 rhizome(프랑스어로 뿌리를 뜻하는 말로 다양성이나 다면성의 형태를 일컬음-옮긴이)이라고 명명했다. 이 ‘트리’와 ‘리좀’이라는 대비구조에 파라노이아와 스키조프레니아를 적용시키면 파라노이아는 트리에 대응한다.

 

그렇다면 다른 한편의 스키조프레니아는 무엇이 분열하는 것인가? 이쪽 또한 ‘아이덴티티’다. 스키조프레니아형 인간은 고정적인 아이덴티티에 속박되지 않는다. 자신의 미의식이나 직감이 움직이는 대로 자유롭게 운동하고 그 시점에서의 판단, 행동, 발언과 과거의 아이덴티티나 자기 이미지와의 정합성에는 집착하지 않는다. 우발적으로 찾아온 변화나 기회는 그때그때 직감이나 후각에 따라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을 뿐, 과거에 축적한 아이덴티티와의 정합성은 고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트리와 리좀의 대비에 비유하자면 스키조프레니아는 리좀에 대응한다.

 

질 들뢰즈는 원래 수학의 미분 개념을 응용해서 ‘차이’를 연구한 철학자다. 파라노이아와 스키조프레니아의 대비를 수학적인 뉘앙스로 표현하면 파라노이아는 적분, 스키조프레니아는 미분인 셈이다.

 

파라노이아와 스키조프레니아라는 개념이 지금 왜 중요한 것일까? 이는 아사다 아키라(浅田彰)의 저서 『도주론』에서 발췌한 다음 부분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파라노이아형의 행동은 ‘정주定住’하는 것이다. 가정을 이루고 그곳을 중심으로 영토 확대를 꾀하는 동시에 재산을 많이 축적한다. 아내를 성적으로 독점하고 태어난 아이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가정의 발전을 위해 애쓴다. 이 게임은 도중에 그만두면 지는 것이다. 그만두지도, 멈추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파라노이아형이 되고 만다. 병이라고 하면 병이지만, 근대 문명은 틀림없이 이러한 편집증적 추진력에 의해 여기까지 성장해온 것이다. 그리고 성장이 계속되는 한, 힘들기는 해도 그 나름대로 안정되게 살 수 있다. 그런데 사태가 급변하기라도 하면 파라노이아형은 약하기 그지없다. 자칫하면 성채에 틀어박혀 전력을 다한 끝에 목숨을 바치는 일도 생길 수 있다. 이때 ‘정주하는 사람’ 대신에 등장하는 것이 ‘도망치는 사람’이다. 이 녀석은 무슨 일이 있으면 도망친다. 버티지 못하고 일단 도망친다. 그러려면 몸이 가벼워야 한다. 집이라는 중심을 갖지 않고, 끊임없이 경계선에 몸을 둔다. 재산을 모으거나 가장으로서 처자식에게 군림할 수는 없으니 그때마다 마침 그 자리에 있는 것을 이용하고, 자손도 적당히 뿌려 두고 그 다음은 운에 맡긴다. 의지가 되는 것은 사태의 변화를 인식하는 센스, 우연에 대한 직감, 그 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틀림없는 스키조프레니아형이라 할 수 있다.

 

아사다 아키라 『도주론』

자손 운운하는 이야기는 차치하고, 아사다 아키라의 지적에는 두 가지 핵심이 있다. 하나는, 파라노이아형이 환경 변화에 약하다는 지적이다. 모두 알고 있듯이 현재 기업이나 사업의 수명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이 상황을 개인의 아이덴티티 형성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면 어떨까? 직업은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므로 하나의 아이덴티티에 얽매인다는 것은 하나의 직업에 얽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과 사회의 두 가지 상황을 종합해 보면 아이덴티티에 집착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일본의 기업인이자 작가인 호리에 타카후미(堀江貴文)도 저서 『다동력』에서 꾸준히 노력하는 시대는 끝났으니 싫증나면 바로 그만두라고 조언한다. 이 말 또한 파라노이아보다 스키조프레니아가, 그리고 트리보다 리좀이 중요하다는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일관성 있는’, ‘흔들리지 않는’, ‘외길 십 년’과 같은 말을 무조건 칭찬하고 보는 어수룩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그런 가치관에 사로잡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편집증적으로 고집하는 것은 이 사회에서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아사다 아키라가 지적한 두 번째 핵심은 도망친다는 점이다. 아사다 아키라는 파라노이아형을 정주하는 사람, 그리고 스키조프레니아형을 도망치는 사람으로 정의했다. 정주하는 사람에게 대치시키려면 이주하는 사람이라든가 이동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방법도 있을 텐데 그렇게 표현하지 않고 ‘도망치는 사람’이라는 정의를 사용했다. 이 지적은 매우 예리하다. ‘도망친다’는 ‘딱히 명확한 행선지가 정해져 있지 않지만 어쨌든 이곳에서 벗어나겠다’를 뜻한다. 이 뉘앙스, 즉 ‘반드시 분명한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 않지만 이곳은 위험할 것 같으니 일단 움직이자’라는 마음 자세가 스키조프레니아형 인간의 특질이다.

 

우리는 직업과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 지, 무엇을 잘하는지를 생각하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나는 이미 졸저 『천직을 기다려라天職は寝て待て』에도 서술했듯이 이런 말이 대개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일이란 실제로 해보지 않으면 재미있는지, 그리고 잘하는 지 결코 알 수 없다. 어떤 일을 하고 싶은 지 생각하며 망설이다 우연찮게 찾아온 기회마저 놓치고 말 우려가 있다.

 

중요한 것은 행선지가 정해져 있지 않더라도 아무래도 위험한 것 같다는 판단이 서면 재빨리 도망치는 일이다. 시선을 응시하고 귀를 기울여 주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확인하라. 앞서 언급한 아사다 아키라의 발췌에서는 “의지가 되는 것은 사태의 변화를 인식하는 센스, 우연에 대한 직감, 그 뿐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내가 『세계의 리더들은 왜 직감을 단련 하는가』에서 “축적형 이론 사고보다 대담한 직감이 중요하다”라고 지적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주위에서 아직 괜찮다고 안심시키더라도 스스로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면 바로 도망쳐라. 이때 중요한 것은 위험하다고 느끼는 안테나의 감도와, 도망치는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용기가 있기에 도망칠 수 있는 것이다.

… (중략) …

세상의 평판에 신경을 쓰느라 침몰해 가는 배 위에서 우물쭈물하다가는 그야말로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 수 있다.

 

다른 수많은 사람이 “일단 이 배에 탄 이상 마지막까지 애써 봐야지!”라며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이 배와 함께 가라앉을 생각이 없습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라고 당당히 말하고 나서 도망치려면 얼마만큼의 용기가 필요한지 상상해보자. 파라노이아와 스키조프레니아를 대비해보면, 후자는 전자보다 경박하고 나약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현재 세계에서는 용기와 강인함을 지니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파라노이아 유형을 지향하고, 용기와 강인함을 지닌 사람만이 스키조프레니아 유형의 인생을 꿋꿋하게 걸어갈 수 있다.

 

야마구치 슈 지음/김윤경 옮김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다산북스, 2019. pp. 237-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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