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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가 아닌 의무로서 교육? 학교교육과 종교교육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억압한다! 본문

인문학

권리가 아닌 의무로서 교육? 학교교육과 종교교육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억압한다!

외톨늑대 ROBO 2021. 5. 22.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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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교회, 자본가는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인간을 싫어한다. 그들은 그들의 명령과 지시에 맹종하는 인간을 '애국자, 산업역군, 신실한 신앙인'이라 부른다.

 


권리로서 교육이 아닌 의무로서 교육

프리드리히 니체는 서구 기독교는 노예의 도덕을 강요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신을 죽였다고 했다. 우리 모두가 함께!

 

근대와 함께 시작된 학교교육은 자유시민을 위한 교육이 아니었다. 교육은 민주주의로 위장한 국가주의, 자본주의와 함께 입헌군주제나 사이비 공화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맹종적인 인간을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즉 가상의 국가 또는 자비 없는 자본가를 위해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신민교육 내지 마름교육으로 병역, 납세, 근로와 함께 강요된 의무였다.

 

자국의 팽창을 위해 제국주의, 식민주의, 군국주의 등 섬찟한 이름의 근대국가는 부국강병 富國强兵, 식산흥업殖産興業에 부응하는 맞춤형 인간을 생산하기 위해 교육이 필요했다. 그래서 법률로 제도화한 것이 학교교육이다. 애당초 학교교육은 참정권처럼 투쟁에 의해 획득한 시민의 권리가 아닌, 국가라는 이름의 리바이어던의 것이었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패해 위기에 빠진 프로이센을 구하기 위해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강연으로 유명한, 철학자이자 독일민족주의자인 피히테(1762~1814 Johann Gottlieb Fichte)는 이성의 학문으로서 교육을 강조했다. 그는 인간의 완전성에서 독일인이 가장 가깝다는 신념을 가지고 만약 독일이 망하게 되면 전인류도 희망을 잃게 될 것이라고 하며 교육을 강조했다.

 

피히테는 독일 젊은이들을 교육시킴으로써 독일을 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류의 도덕적 개혁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나중에 파시즘·쇼비니즘의 근거로 이용되기도 했다. 피히테가 주장하는 교육은 “자유의지를 없애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하며, 학교를 마친 사람들이 학교들이 원하는 바에서 벗어나는 생각이나 행동을 할 수 없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피히테 시대의 바람직한 학교는 군인이나 관료와 마찬가지로 자유의지를 거세한 산업사회가 필요로 하는 순종적인 인간으로 개조하는 공장이었다.

 

<톰소여의 모험>으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 Mark Twain(1835~1910)은 이미 19세기 말에 학교교육 무용론에 대해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태초에 신은 바보들을 창조했다. 그것은 연습용이었다. 이어서 신은 본격적으로 교육위원회를 만들었다”고. 여기에 덧붙여 진보적인 개신교회의 성실한 장로였던 그는 “예수께서 지금 여기 계시다면, 그분께서는 기독교인이 되려 하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기독교 근본주의를 비판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억압하고, 노예의 도덕을 강요하는 기독교

 

대부분의 종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억압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기독교와 이슬람이 그렇다. 이 두 종교는 수백 년 동안 신의 이름으로 싸운 전쟁, 죄를 사한다는 명목의 폭정, 사악한 무리를 물리친다는 명목의 폭압이 중세를 거쳐 지금도 횡행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교회의 목사들이 신앙심이 돈독한 사람일수록 지성적으로 훌륭한 것처럼 선전한다. 이 어처구니 없는 선전(설교)은 생각하는 능력이 떨어진 사람일수록 더 잘 믿는다. 그들은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 무지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교리가 일신론에 근거한 것으로 믿을 정도의 지적 수준이다. 기독교가 선 善의 종교라면, 물리쳐야 할 악 惡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기 위해 악 惡을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선 善의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악 惡이 필요했다. 필요악! 말이다.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잘못된 종교교육에 대해 버트런드 러셀은 “종교교육은 신앙심과 미덕을 동일시하고, 따라서 무지한 사람들에게 학식이 있는 사람들의 권위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준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러셀은 종교교육과 함께 학교교육의 비열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자신의 소신이 이성에 근거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상대를 박해하는 대신 토론을 통해 소신을 입증하려 하고, 토론 결과가 자신의 소신과 상충할 경우에는 그 소신을 버린다. 그러나 신앙심에 근거한 소신을 지닌 사람은 토론을 통해 소신을 입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에는 힘에 의지해서 박해를 하거나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젊은이들의 정신적 성장을 저지하고 왜곡시킨다. 이는 젊은이들의 정신이 미숙하여 방어할 능력이 없는 것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비열한 행동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문명국가의 학교들이 이런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니,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다.

버트런드 러셀, 윤리학과 정치학에서 보는 인간 사회, p. 145

 

사람이 주체가 아닌 자원으로 취급하는 한국에서는, 학교교육의 차원을 넘어 국민교육의 차원에서 자유의지가 없는 순종적인 인간, 생각해서는 안되는 중세 기독교적 인간을 양성하는 교육이 여전하다. 한국사가 아닌 국사, 한국어가 아닌 국어·국문으로 사용하는 나라,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스스로 세뇌하는 한국인은 언제까지 구시대의 유물을 떠받들고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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