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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CIA의 공작으로 탄생한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황태자 잭슨 폴록

외톨늑대 ROBO 2022. 1. 13.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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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 와 MoMA가 낳은 추상표현주의 잭슨 폴록

Jackson Pollock’s No. 5, 1948

 

지금까지 미술시장에서 거래된 최고가의 미술작품은 2006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억 4,000만 달러에 낙찰된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넘버 5」. 대중에게 그토록 인기가 있는 반 고흐, 르누아르 등 인상파 대가들조차 따돌리고 폴록이 이렇게 최고의 작품 값을 자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일정 부분 냉전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미국 중앙정보국 CIA가 있다.

 

20세기 문화 아이콘 잭슨 폴록 Paul Jackson Pollock

 

폴록은 추상표현주의의 빛나는 스타다. 추상표현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말 형성되기 시작해 1950년대에 절정에 이른 미국의 미술 사조. 이름이 시사하듯 추상의 세계를 추구하되 이를 표현주의적으로 거칠게, 과감하게 표출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폴록이 최고의 간판스타가 된 것은, 캔버스를 바닥에 깔고 물감을 흩뿌리는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추상표현주의의 심벌로 안성맞춤이었던 데다, 개인주의ㆍ자유ㆍ순수성 같은, 당시 자유세계가 공산주의에 맞서 외치던 가치를 마음껏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CIA 가 폴록과 추상표현주의에 주목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순수성' 때문이었다.

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문화와 예술을 놓고 나치와 정보ㆍ전략 싸움을 벌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후의 CIA는 소련과 '문화전쟁'을 벌여야 했다. 파시즘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는 유럽에서 공산주의의 인기를 크게 높여 놓았다. 공산주의는 특히 서유럽의 저명 예술가들과 문화인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갖고 퍼져나갔다. 피카소 등 유명 인사들이 공산당에 가입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공산당의 영향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났다.

유럽의 흔들림에 CIA는 긴장했다. CIA가 보기에 이념전쟁은 아무래도 공산주의 이론과 생리를 잘 아는 좌파 출신이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그래서 미국 공산당 창립 멤버인 제이 러브스톤과 노조활동가 어빙 브라운을 협력자로 끌어들였다. 하지만 유럽의 노조들을 분열시키는 아쥬노조 공작만으로는 한계가 많았다. 무엇보다 문화면에서 소련을 압도하고 유럽을 사로잡을 수 있는 고도의 전략이 필요했다. 이는 CIA 자체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문가들의 도움이 절실했던 CIA 이 '문화전쟁'의 핵심 작전세력으로 뉴욕현대미술관 MoMA(Museum of Modern Art) 관계자들을 끌어들였다.

 

뉴욕현대미술관 MoMA

 

현대미술관 이사회의 존 헤이 휘트니와 윌리엄 버든이 각각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직보하는 심리전략위원회 위원과 CIA의 비밀공작기금을 세탁하는 파필드재단 Farfield Foumdation 이사장으로 위촉됐다. 현대미술관의 실질적인 재배자 넬슨 록펠러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심리전을 위한 핵심 고문으로 임명되었고, 관장을 지낸 톰 브레이든은 정식 CIA 요원이 되어 문화전쟁을 지원하는 실무 총책임을 맡았다.

CIA의 목표는 소련의 미술과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미술을 미국의 미술, 나아가 세계의 미술로 진흥시켜 미국의 사상적ㆍ문화적 우위를 유럽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 확실히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은 정치적 목표와 이념에 충실히 복무하고, 전체와 집단을 중시하며, 양식상으로는 구상적인 미술이었다. 이에 따라 CIA는 모마 출신 인사들의 협력을 받아 정치와 이념으로부터 자유롭고, 개인주의적이며, 양식상으로도 추상적인 미술, 곧 추상표현주의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된 것이다. 이이러니컬한 것은, 이 과정에서 극단적으로 순수를 표방한 추상표현주의가 국가와 정치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그 어느 정치미술보다 더 정치적인 미술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공작은 비밀리에 수행됐다. CIA가 추상표현주의를 밀고 있다는 사실이 공개될 경우 이는 대외적으로 미국에 큰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었고, 대내적으로는 추상표현주의 같은 전위예술을 좋아하지 않는 미국 내 보수인사들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었다.

당시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이 가장 선호한 미술가는 전형적인 미국인들의 모습을 구상 형식으로 표현한 노먼 록웰이었다. 그러나 유럽의 지성들에게 그와 같은 '철 지난' 구상화로 미국 문화의 우수성을 과시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오히려 미국을 고루한 문화의 변방국가로 낙인 찍을 위험성이 있었다. 반면 추상표현주의는 유럽의 전위미술보다 더 전위적이고 실험적이라는 인상을 주었을 뿐 아니라, CIA의 러시아 담당 도널드 제임슨의 말처럼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을 실제보다 더 양식화되고 완고하고 제한된 미술로 보이게 만드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CIA는 은밀히 그러나 강력하게 추상표현주의 미술을 지원했다.

유럽에서의 공작은 '문화적 자유를 위한 회의 CCF(Congress for Cultural Freedom)'라는 CIA의 전위조직을 통해 주로 전시회를 개최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형식을 이뤘다. 1952년 파리에서 열린 <걸작의 향연>, 1955년 로마에서 열린 <젊은화가들 >이 그 대표적인 전시다. 물론 미술계의 큰손들이 이런 전시에 출품된 작품을 가급적 많이 구매하도록 독려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미국 안에서도 추상표현주의에 대해 우호적인 환경이 만들어지도록 많은 노력이 펼쳐졌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비평가로 꼽히는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현대미술과의 교감 속에서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사격'에 나섰다. 이 미술에 원천적인 애정을 품고 있었던 그는 해박한 지식과 정연한 논리로 추상표현주의가 국제적으로 공인받는 데 큰 힘을 보탰다. 그는 순수한 비평의 전개에 만족하지 않고 1950년 CIA의 미국 내 전위조직인 '문화적 자유를 위한 미국위원회 American Committee for Cultural Freedom'에 가입하는 한편 미국의 엘리트들이 추상표현주의를 지지해야 한다고 강력이 주장하는 선동가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당시 매주 500만 부를 발행하던 『라이프』지가 1949년 8월 8일자 와이드 특집으로 「미국 미술의 빛나는 새 현상」이라는 기사를 게재한 것도 이런 시류와 무관하지 않았다.

CIA와 추상표현주의의 이와 같은 만남은 결국 추상표현주의가 미국 미술로는 역사상 처음으로 전 세계적인 미술 사조로 우뚝 서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전쟁 전에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대체로 구상적인 전통을 유지하던 미국 화단에서 이처럼 전위적인 미술이 급부상한 것은, 그리고 이후 미국 미술이 세계 미술계를 주도하는 헤게모니를 쥐게 된 것은, 단순히 자연스러운 변화에 따는 것이라기보다 상당 부분 이런 전략적 캠페인의 성과와 영향 탓이 컸다.

 

당시 이런 노력에 동참했던 CIA의 협력자들은 그 동기를 애국심과 문화 지원 등에서 찾았다. 공적인 가치를 위해 순수한 마음으로 헌신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에게 다른 개인적인 이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례로 록펠러는 추상표현주의 작품이 쌀 때 많이 사들여 이후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보았다. 정부 예산이 비밀공작에 쏟아지는 등 국가가 이 미술을 적극 지원하는 상황에서 추상표현주의의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록펠러는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밀어야 하는 이유가, 이 그림들이 '자유기업회화 Free Enterprise Painting'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가 체이스맨해튼은행을 장식하기 위해 구입한 것만 2,500여 점에 이르렀다. 가히 기업적인 투자였고 기업적인 성공이었다.

(pp. 263-271)

 

출처: 이주헌 『지식의 미술관』아트북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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